Meal of Our Lord and the Apostles, by Tissot 2016년 4월 10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 사도 5,27ㄴ-32.40ㄴ-41 그 무렵 대사제가 사도들을 27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사도들에게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제2독서 : 묵시 5,11-14 나 요한은 11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복음 : 요한 21,1-19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016년 4월10일 부활 제3주일 새벽을 열며 /조명연 신부님 음식을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훌륭한 조리도구일까요? 아닙니다. 음식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더욱 더 신나게 음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음식 맛도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현재 식복사 없이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에 안식년을 보내면서 식복사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를 찾아준 신부님이나 다른 지인들도 이 정도면 웬만한 주부 정도는 된다고 하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기에 더욱 더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식사 준비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하기 귀찮다고 밖에 나가서 간단한 식사로 한 끼를 때울 때가 많아졌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바쁜 것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제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안식년 때에는 신부님들이나 지인들이 많이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을 해 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나가서 식사하지 않고 제 숙소에서 요리를 해서 직접 먹었지요. 음식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있었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강화에 살다보니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확 줄었습니다. 또한 음식을 잘 만들지 않다보니 누가 찾아와도 집에서 요리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즉, 함께 해줄 사람이 있어야 행복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갑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그들은 심한 허탈감과 좌절감을 느꼈지요. 그리고 관심 자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그냥 세상의 흐름에 맡기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대화를 했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관심이 주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따르고서 수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말씀해주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들과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아무런 물고기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무의미한 시간만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서 함께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것들을 얻을 수가 있으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음식 잘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어디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알버트 아인슈타인).
티베리아스 호수의 어부. 주님께서는 누구를 좋아하실까요? 어떤 어머니에게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두 아들이 있어요. 큰아들은 장남답게 착하고 의젓해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 혼자서 척척 하지요. 그에 반해서 작은아들은 얼마나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지 몰라요. 산만하고 또 이기적이어서 혼자는 잘 하려고 하지 않고 저를 늘 불러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큰아들보다 작은아들에게 더 정이 가요. 매번 작은아들과 함께 해서 그럴까요?” 분명히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큰아들이 작은아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입장에서는 작은아들에게 정이 더 간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든 도와달라고 청하는 작은아들과 늘 함께 했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주님께서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착하게 살고 혼자서 척척 알아서 하는 우리를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과 함께 하려는 우리를 더 좋아하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원하실 것입니다. 비록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웃으면서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아.”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10년 전에 자주 갔었던 가게.아직도 낡은모습그대로 함께 하고 있네요. 2016년 4월10일 부활 제3주일 /조재형 신부님 지난번 사제연수에서 ‘이단에 빠졌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범한 젊은이였고, 신앙생활을 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절박감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야기 할 친구나 이웃이 없었습니다. 성당은 친목과 친교의 장소는 되었지만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성당에서 성서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사제들은 늘 바쁜 것 같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 말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와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열면 성서에 대한 공부를 함께하고, 이제 곧 종말이 다가오니 함께 준비하자는 말은 큰 위로가 되었고, 새로운 열정에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새로운 체험을 하였고,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는 오지 않았고, 학업에 소홀하게 되어 성적은 바닥을 치고, 직장에서는 업무에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변한 젊은이들을 걱정하는 가족들과는 담을 쌓게 되고, 집을 나가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조직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듯이 영적으로 병이든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상담을 하고, 다시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봉사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젊은이들과 상담을 하면서 그릇된 교리에 빠진 친구들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매님께서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를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지원을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자매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성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잘 포장된 성서의 이야기와 친근한 접근은 아주 쉬운 포섭의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이단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또 다른 구원자를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종말이 다가오니 세상과는 담을 쌓고, 자신들만의 비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교주를 위해서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 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날과 그때는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종말을 팔아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놀라운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쁜 바이러스나 세균이 우리의 몸에 들어오면 우리 몸은 면역체계를 가동해서 바이러스와 세균을 몰아냅니다. 바이러스와 세균을 없애는 것은 우리의 몫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걱정할 필요도 근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면역력을 키우면 이단을 만나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단에 물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좋은 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우리의 면역력을 키워줄 곳들이 있습니다. 성서 못자리, 성서 백 주간, 청년 성서모임이 있습니다. 주보를 보면 많은 피정과 교육이 있습니다. 구역모임, 레지오, 성가대, 전례단과 같은 모임이 본당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버려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담당사제로 있는 ‘복음화 학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1단계부터 5단계의 과정을 통해서 복음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며 실천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 제게 하신 말씀 같습니다. ‘가브리엘 나를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내 양들을 잘 돌보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여러분들의 세례명을 넣어보시면 어떨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양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들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사명이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처음 먹었던 마음이 너무도 자주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는 매일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성사를 최선을 다해서 집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처음 먹었던 마음은 타성에 젖고, 습관처럼 지나치게 되곤 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 사람이 생각보다 유능하고, 부유하면 나의 태도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이 겉보기 보다 가난하고, 능력이 없으면 처음 가졌던 느낌이 줄어들곤 하였습니다. 사람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겉모습과 능력,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능력을 떠나서, 나의 외모를 떠나서, 나의 성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처음처럼 저를 사랑하시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도 우리가 가졌던 신앙을, 우리가 만났던 소중한 이웃들을 처음처럼 간직하고 사랑했으면 합니다. 2016년 4월10일 부활 제3주일 /오상선 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 적이 있나요? 크든 적든 그런 일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찌 사랑한다면서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진짜로 사랑한 것이 아닐거야~ 믿을 수 없어~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입니다. 정치의 역사도 배신의 역사이고 하느님의 사람들조차도 하느님을 배신한 적이 한두번씩은 다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배반의 역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배신으로 인한 상처를 많이 입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마저도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배반의 죄라고 하겠지만 예수님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적 약함은 있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갈지 말고 그의 인간적 약함 때문이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여기고 용서해 줍시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덮어주는 여러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처럼... 2016년 4월10일 다해 부활 3주일 요한 21,1-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시는 주님 /기경호 신부님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침이 될 무렵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해주시고, 손수 아침을 준비하시어 같이 식사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먼저 그분을 알아봅니다(21,7).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돌아가시자 두려움과 좌절에 빠진 나머지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예전의 일터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밤의 어둠 속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숯불 사랑’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제자들을 절망과 당혹감, 좌절감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끈 빛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겪었던 이 과정은 내 안에서도 되풀이되곤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사회적 불의 앞에 무기력함을 느낄 때,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 쉽게 내가 원하는 일상에 안주해버리곤 하지요. 참으로 그런 어둠의 순간이야말로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어 내 일상의 그물이 터지도록 풍요롭게 해주시고, 생명을 시작하는 아침밥을 차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피곤하고 고달플 때일수록 내가 만든 동굴이 아니라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할 때입니다. 제자들이 아침을 먹은 뒤 예수님께서는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21,15)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양들을 쳐야 할' 으뜸 사도로서 지닌 막중한 사랑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거듭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21,17)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난 뒤 세 차례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신했었지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쓰라린 아픔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고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거듭 사랑을 확인하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양들을 치며, 교회의 반석이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질문을 통해 베드로 스스로 자신 안에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정화된 사랑을 지니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거듭 되는 질문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매순간 나의 어둠과 절망, 실패와 고통, 죽음의 상황, 죄책감과 수치심의 한복판으로 다가오시어 다시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펴주시는 사랑의 모닥불에 나의 고통과 시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올려 희망을 숨쉬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Peter Jumps into the Water, by Tissot 2016년 4월10일 부활 제3주일. /한상우 신부님 "주님이십니다."(요한 21, 7) 아무 것도 못잡은 거기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합니다. 주님 없이는 일상의 물고기조차 건져 올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반복하며 지나갔던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건져올리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모든 것은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한 곳에만 집착했던 우리가 다른 곳까지도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우리의 일상안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는 거기에서 빵과 물고기의 성체성사의 식탁이 차려집니다. 부활체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생생한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는 제자들의 손끝에서 부활은 이미 시작됩니다. 일상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가리킨 곳이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드디어 부활의 일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일상이 예수님의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못잡은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2016년 4월 10일 부활 제 3주일- 내게 필요한 체험들 /김찬선 신부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시는데 예루살렘에서 두 번 나타나시고 세 번째는 갈릴래아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20장에 맺음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20장에서 주님은 두 번이나 나타나셨고 사명도 주셨는데 오늘 21장에서 세 번째로 나타나신 얘기를 덧붙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앞뒤 연결이 부자연스럽고 뭔가 이상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것처럼 몰라보고, 이미 사명을 받았는데도 아무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간다는 것이 고작 갈릴래아이고, 하릴없이 고기나 잡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니 다른 제자들도 따라갑니다. 그런데 고기 잡는 것이 그래 사명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그러므로 고기 잡는 행위는 아직 자포자기 상태이거나 아직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 자의 행위이거나 무엇인지 알고는 있지만 수행할 용기가 없어서 미적거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까지는 뭔가 더 확실한 체험이랄까 담금질이랄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노력의 허사체험, 하느님의 능력체험, 하느님의 사랑체험. 이 세 가지 체험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오늘 제자들처럼 밤샘 고기잡이가 허사가 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면 허사가 되는 체험, 하느님의 일일지라도 하느님 없이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고, 아무리 여럿이서 기를 써도 허사가 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이런 체험 다음에는 하느님의 능력체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나의 힘을 빼야만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그리고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와야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명인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하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체험을 해야 합니다. 능력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체험이라는 얘깁니다. 실상 하느님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곧 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능력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원치 않고 하느님의 능력만을 받으려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없는 하느님의 능력은 금세 고갈되고 말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삼손의 머리카락과 힘의 관계와 같습니다. 삼손은 원래 하느님만을 사랑하도록 성별되고 봉헌된 나지르인이었지요. 그리고 그 표시로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렀지요. 그런데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함으로써 머리를 자르게 되고 머리가 잘리자 삼손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지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여인을 사랑하자 하느님의 힘이 그에게서 빠져나간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만 하느님의 힘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사도들처럼 열정적으로 선포하게 됨을 오늘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Feed My Lambs, by Tissot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결국 사랑입니다 /양승국신부님 대인관계 안에서 정말 참아내기 힘든 모습이 무관심인 것 같습니다. 그 어떤 표현을 해도 그저 무표정입니다. 심드렁합니다. 분위기도 냉랭합니다. 얼굴 마주치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합니다. 차라리 내면의 분노나 공격성을 드러내놓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미움보다 더 나쁜 것이 무관심이란 말 백번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치 갓 낚아 올린 물고기 같은 싱싱한 관계맺음이 있습니다. 그 관계는 생동감이 넘칩니다. 파닥파닥 뜁니다. 생기 있는 대화가 오고 갑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맺어진 관계 맺은 방식은 참으로 역동적입니다. 때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한때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때로 떠나가기도 합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관계는 더욱 심오해집니다. 성숙해집니다. 흥미진진해 집니다. 그 배경에는 ‘예수님’이란 ‘보물창고’가 있습니다. 다른 인간과는 달리 예수님과의 관계는 싫증나지 않습니다. 식상하지 않습니다. 정체되지 않습니다. 어색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관계가 진전되어갈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점점 더 매력이 증대됩니다. 점점 더 감미롭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졌던 관계맺음 방식의 특징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졌던 관계, 참으로 다사다난했습니다. 마치 한권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합니다. 반신반의와 불신, 배신으로 얼룩진 베드로의 부실한 처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노력은 한결같습니다. 눈물겹습니다. 끊임없이 용서하십니다. 지속적으로 화해를 시도하십니다. 끝도 없이 넘치도록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가기에 앞서 수제자 베드로와 그간 이어져왔던 관계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시는데, 결국 결론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당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위틈에 숨겨져 있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사랑을 찾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사실 그 사랑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변함없는 사랑, 한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 깊고 조용한 사랑,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건네신 사랑이었고, 오늘 복음에서 확인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영원한 사랑과의 영원한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약간의 시간일 뿐입니다.”(아베, 피에르 신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강영구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 즉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다짐하듯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고 싶어서 세 번 씩이나 묻습니다. 그가 비록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물처럼 흐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그릇이 되면 그 사랑이 흘러넘쳐 양들에게 미칩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지금 저와 당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The Lord Is My Shephe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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