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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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칠한 손 잡아 줄 땐 위로하기보다 위로 받아
병간호를 하는 아주머니가 기 신부님이 평소 입으셨던 속옷 바지를 옷장에
서 꺼내 보여 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데다 신부님이 직접 바느질을 하셨
는지 엉성하게 꿰맨 흔적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속옷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복음적 청빈의 표징처럼 느껴졌기 때
문이다.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어느 신부가 그처럼 낡은 속옷을 입어 본 적이 있겠는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내 신앙과 생활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
을 스스로 던져 보곤 했다. 대답은 '아니다'에 가까웠다. 특히 사제로서 지
향해야 할 복음적 청빈생활에는 분명하게 아니다 이였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가 복음적 청빈인데도 말이다.
주교관 집무실에 앉아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주교관을 떠나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 수는 없을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열
망에 몸살을 앓았던 본당 신부 시절이 그리워서 더 그랬을 게다.높은 자리
라는 게 간혹 창살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웃고 울었던 본당사목 시절을 떠올리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에 들어가 사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비서신부와 끼니를 챙겨 줄 식 복사는 따라와야 한다. 여기 저기 다니려면
승용차도 필요하다. 수시로 내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응접실이 넓어
야 하고 주차장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이 커야 한다.
결국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은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내 꿈은 물거품처럼 꺼지고 다시 추기경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다.
70년대 중반쯤 빈민촌에 뛰어든 정일우(예수회) 신부님과 고(故) 제정구 의
원이 양평동 철거민들을 이끌고 경기도 시흥시 신천리라는 곳에 이주했다.
철거민 집단이주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
가는 여정과 같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줬다.
정 신부님은 정착 촌 복음자리에 내 방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러 번 가 보기는 했으나 자고 온 적은 한번도 없다.공동 화장실을 사용
해야 하는 등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자고 가라고 할 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는 준 본당을 사목방문차 가본 적이 있다.그 곳 신부
님과 신자들이 시장구경을 시켜 준답시고 나를 반시간 남짓 끌고 다니는데
정신이 없어서 혼났다. 비좁고 공기가 탁한 시장 통에서 삶을 꾸려 가는
상인들, 또 시장을 성당처럼 여기고 사목하는 신부님이 정말 대단해 보였
다. 나라면 사목은커녕 한 달도 못 가서 병이 나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은 꿈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추기경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서라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우지 못했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
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고, 그토록 자주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했으면서도
나는 왜 스스로 몸을 굽혀 장애인들 수발 한번 들어줘 보질 못했는가. 조금
후회스럽다. 지금은 그런 봉사를 하고 싶어도 누가 이 힘 빠진 늙은이에게
일을 맡기겠는가.
그러나 잠시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머문 시간은 행복했다. 성탄
전야에 산동네와 소규모 사회복지시설 같은 곳에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이
유이기도 하다. 또 그들에게 보탬이 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
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정일우 신부님이 철거민들을 이주시킬 부지를 물색할 때도 내가 정부 모처
에 시쳇말로 '빽'을 좀 썼다. 어느 날 정 신부님이 "대한민국이 어디 있습니
까? 이 나라에 국민이란 존재가 있기나 하는 겁니까?"라며 분노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정 신부님은 발 품을 팔면서 땅을 물색하러 다녔지
만 쓸만한 땅은 전부 힘있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팔지를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그래서 내가 정부측에 "도시개발에 쫓겨난 힘없는 서민들은 내
팽개치고 과연 누굴 위해 일 하겠다는 정부냐"고 항의했더니 금방 일이
성사됐다.
그 즈음에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쓰레기
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난지도 쓰레기장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다.그 척박
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수녀들 얘기를 들으면 '나도 한번 가 봐야지'하
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더구나 내가 가서 가난한 사람들 손 한번이라도 잡아 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하기에 늘 기쁜 마음으로 그런 현장을 찾아다녔다. 나 역시 그들의 꺼칠한
손을 잡아 줄 때는 내가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들 삶 속에 하느님이 머물러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북탄광 현장체험(1985년)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시아 사회주교연수회
(BISA) 프로그램에 따라 주교들이 현장체험을 하기로 했는데 나는 '인생
막장'이라는 탄광을 선택했다. 그 때만 해도 탄광 붕괴사고가 툭하면 발생
해 구조현장에서 울부짖는 가족들 모습이 TV 뉴스에 자주 비쳤다.
또 탄광촌 부인들 사이에 춤 바람이 나서 사회 문제가 될 때였다.
막상 갱까지 기어 들어가서 탄을 캐는 척 해 보니까 이건 보통 고역이 아
니었다. 몸을 곧추세울 수도 없이 좁은 탄 구덩이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 7시간, 8시간씩 일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에 한국
인 노무자들과 막장에 가본 적이 있지만 한국 탄광은 작업환경, 특히 안전
면에서 너무나 열악했다.나 같은 사람은 한나절은 고사하고 한시간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갱에서 나와 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남편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저 고
생인데 부인들이 춤이나 추러 다니면 되겠느냐"며 야단(?)을 치고 돌아왔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슬퍼 우는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그들과
삶을 나누지는 못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한다.돌아보건대 난 인간 문제에 대
한 애정과 관심이 깊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몸과 피까지 내어 주셨는
데 난 그 흉내도 내보지 못했다.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한테
꾸지람들을 잘못이 그 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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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래도 밤이어라 Aunque Es De Noche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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