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전달
- 이제민 신부
슬픔에 잠긴 사십대 초반의 한 가장이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했다.
우리 본당 소속이 아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인이 벌써 한 달 넘게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데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인이 쓰러진 원인이 자기가 오래도록
냉담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부인이 쓰러진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냉담한 당신이 미워서 아내에게 그런 무서운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이라면
어찌 그분을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무자비한 하느님에게 어찌 병을 낫게 해달라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그런 정도로 시시콜콜 잘잘못을 따지는
비정한 분이라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하며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절망하는
그의 마음을 달래기엔 역 부족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고통에서 벗어나 낫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 아파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아내의 고통은 당신이 하느님을
외면한 탓이 아니라거나,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당신들과 함께 계신다거나,
하느님은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위하여 괴로워하신다는
따위의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갈 리 없고,
그런 교리가 그에게 위로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괴로워하는 그 심연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세요. 당신과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 보세요."
하는 식의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말을 들으려 나를 찾아 온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게 할 능력이 없는 나는
자신을 원망하며 말했다.
아내에게 닥친 일로 마음이 괴롭겠지만 이 사건을 통해
그동안 아내에게 소홀히 한 것을 뉘우치며
지금이나마 마음을 다해 아내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내는 지금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 있지만
분명히 당신의 마음은 전달되고 위로를 느낄 것이라고..
그는 고맙다고 하였다.
나는 그 고마움의 표현이 내가 아니라
아내에게 향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어쩌면
고맙다는 말뿐인 듯 그는 거듭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그 말에 지금껏 아내와 살아오며 아내를 섭섭하게 한 일,
사랑한 일, 못 다 한 말이 다 함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여태껏 아내에게 잊고 있던 말들을
지금 내게 쏟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중풍으로 드러누운 하인의 괴로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백인대장의 마음은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주님을 찾은 것은 그의 믿음이다.
그의 사랑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하인에게 전달되었듯이
(마태 8,5-13 참조)
그렇게 이 젊은 가장의 애틋한 마음이
의식을 놓고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아내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주님의 자비를!
-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사람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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