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스크랩] 2014,5,2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 조영만 신부, 도정호 신부, 박상대 신부

maria4759 2014. 5. 29. 01:00

 

 

 

 

 

 

 

조영만 신부

 

 

 

마치 수수께끼, 암호와도 같은 오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 공동체가 처한 절박한 상황,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 구원의 길에 모든 것을 내걸고 걸어가기 시작한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감당해야 했던 막막함과 두려움을 생각한다면

아마 오늘 복음 내용은 그런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빚어질 수 있는

고민과 갈등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스승은 떠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곧 돌아오시리라고 굳게 믿었던 스승께서는 쉬이 오시질 않습니다.

머지 않아 다시금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화려하게 등장하시리라고 모든 것을 걸고 믿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도대체 언제 오시는가?” 에 대한 막연한 질문들이 쏟아졌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기대만큼 예수님의 재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이 끝없어 보이는 고통 앞에 지리멸렬해지기만 합니다.

 

 

 

이것에 대한 요한의 해법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시 보게 될 그 날이 안고 있는 종말론적 의미의 이해입니다.

사람들은 몇 월 몇 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하고 기다리지만

요한이 바라볼 때, 예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발견하는 일임을 요한은 깨달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했을 때, 출산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이미 아이를 만났습니다.

내가 서울을 가려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비록 몸은 아직 부산에 있지만 동시에 나는 이미 서울과 맞닿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종말론은 그렇습니다.

몇 월 몇 일 날 받아놓은 것이 종말론이 아니라,

어떻게 될지 뻔히 그 결과가 드러나 있는 이 세상에서 얼마만큼이나 나의 종말, 나의 마지막 순간을, 천년만년 이어질 것으로 미루지 아니하고,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 마지막을 살아낼 것인가? 나의 마지막 날을 <오늘 끌여 당겨 사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고 또 곧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는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어느 병원 병실에 이렇게 적혀 있다지요.

 ‘당신이 맞은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한 이 사실마저도 너무 쉽게 잊고 살지 않습니까?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닌데, 정말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은 예외이기를 바라며 사는 것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요, 이 세상 아닙니까?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떠나가신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종말에 드러나실 분께서 바로 지금,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때에 내어맡긴

사람들과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신다고,

그분을 죽인 세상이 지금은 즐거워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아니하고

곧 근심으로 바뀌게 될 날이 이미 지금 시작되었다고,

요한은 앞이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이 엄청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죽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종말에 관하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단 한 가지 우리에게 맡겨진 선택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피할 길은 없지만,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얼굴로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내 종말의 모습도 대단히 많이 달려져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의 유언을 묵상하는 이번 한 주간,

내 마지막 모습이 이미 지금 나의 얼굴 속에 들어있음을 더욱 뼈저리게 끌어안았으면 합니다.

 

 

옆에 혹시 거울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지금 얼굴은 어떠십니까?

여한 없으십니까?

혹 여한 남길 일 있으시면, 지금 그것을 푸시기 바랍니다.

아멘.

 

 

부산교구 조영만 신부

 

 

**********

 

도정호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처럼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생각하시면서

제자들과 시간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염두에 두면서 묵상을 했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남겨주려는 예수님의 심정을 먼저 헤아릴 수 있을 때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봐도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올바로 볼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변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것이 신약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이유를 제자들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실을 바탕으로, 짧은 생각이었지만 현실적인 생각으로

예수님 곁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 덕분에 정치, 경제적으로 한 자리나 한 몫을 차지할 생각으로,

당신 덕을 볼 생각으로 곁에 머물렀던 제자들이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도 당신의 참 모습은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이때는 참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했을 때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고, 그때 가서는 제대로 보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세상에 연연했던 모든 근심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게 되고,

예수님 한 분으로, 하느님으로 충분하기에 모든 것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봅시다.

 

 

우리는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현실의 영향으로 인해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있고 짧은 생각과 잘못된 신앙심이

신앙생활에서 많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항구한 사람도 있고,

어렵고 힘들 때만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으로 고통을 이겨낸 후 감사는 드리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먼저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하느님께 대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도

금방 잊어버리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무엇을 해 주시는 분입니까?

 

 

현실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먼저고 부귀와 명예, 권력이 중요합니다.

그로인해 걱정도 근심도 많아집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제자들이 짧게 생각했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산다면 오늘 복음처럼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앞에서는 극악한 죄인도, 권력자도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순수함 앞에 세상의 죄악과 권력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에 세상 부귀영화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주님으로 만족하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가진 것 나누고,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산다면

 조금 있으면 나이 세상을 통해서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도정호 신부

 

 

 

 

**********

 

 

 

박상대 신부

 

 

세기의 역전극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의 복음(15,26-16,15)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하느님의 정체는 실제적이고 학습적인 차원으로 계시되었다.

 

 

성령 하느님의 실제적인 차원은 굳건한 신앙의 행위에 대한 보호자로 계시된 점이고,

학습적인 차원은 올바른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진리로서의 계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파견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기에(16,7)

다시금 예수님의 떠남이 언급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떠남잠시 동안에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조금 더 있으면’,

즉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6)

 

 

오랜만에 제자들이 반응을 보인다.

 2차 고별사가 시작되고 꽤나 오랫동안 침묵으로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함’,

 ‘조금 더 있으면 다시 보게 됨’,

 ‘아버지께 가심등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수군거린다.(17-1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아심을 직감하시지만 직접적인 해답을 주시기보다는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임을,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이 곧 기쁨으로 전환될 것임을 예고하신다.(19-20)

 

 

 

제자들의 머릿속이 꽤나 혼란스럽다.

보지 못한다? 보게 된다? 못 본다? 본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보면 보는 것이고, 못 보면 못 보는 것이지,

보지 못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가?

 

 

 

제자들의 머릿속에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는 말씀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못 보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신가.

성경을 앞에 둔 우리는 이 대목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발현, 승천과 성령강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림(再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다.

 

 

 

우리 인간은 만나서 헤어질 때 그럼, 잘 가. 다시 보자”, “또 보자고 말한다.

꼭 언제 다시 볼 것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막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별이 죽음이라면 그런 말은 더 이상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못 본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있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죽음과 부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이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의 고통에서 기쁨이 솟아나고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생명과 기쁨이 죽음과 고통을 대체할 수는 없다.

죽음 없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고통 없이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은 참혹하고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고통과 죽음의 시간에 죽어가는 스승과 함께 어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두 번 다시는 없을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세상은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

고 세상은 확신한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를 제거했음을 오만과 자만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기쁨도 제자들의 슬픔도 그 어느 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둘을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20)

 

 

 

세상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도 잠시 동안은 못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오시게 될 성령안에서 그분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 사이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시간적 부재(不在)는 제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다시없을 세기(世紀)의 역전극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참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참된 생명과 기쁨은 사실상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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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가톨릭 사랑방
      글쓴이 : 수풀孝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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