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동 신부가 미사를 마친 후 퇴장하고 있다. 10개월 사이 체중이 30㎏이나 빠져버린 이 신부의 얼굴이 다소 지쳐 보인다. 왼쪽은 수단어린이장학회와 톤즈를 방문한 살레시오회 선교국장 홍부희 신부.
▲ 이해동 신부가 한 어린이의 머리를 잡고 ‘비행기’를 태워주고 있다.
▲ 한센인 마을인 ‘라이촉’을 찾은 이해동 신부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0개월 동안 30㎏ 빠져
톤즈에서 만난 이해동(살레시오회, 57) 신부는 “10개월 동안 체중이 30㎏이나 빠졌다”고 했다. 머리카락은 덥수룩했고, 샌들 사이로 보이는 발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있었다. 얼굴은 다소 지쳐 보였다. 그는 “1년여 동안 이곳에 지내며 한계를 많이 느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 신부는 톤즈의 세 번째 한국인 선교사다. 2008년 이태석 신부가 떠나고, 2년 뒤 우경민(살레시오회) 신부가 파견돼 1년여 동안 활동했다. 그 후 4년 만인 지난해 봄 이해동 신부가 파견됐다.
해외 선교는 이 신부의 오랜 꿈이었다. 사제품을 받기 전부터 해외 선교를 지망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쉰이 넘어서도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러던 중 남수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 고미노(살레시오회) 수사가 “해외 선교를 생각하고 있으면 꼭 톤즈로 오라”고 수차례 권유해 톤즈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신부는 살레시오회 톤즈 공동체에서 3명의 신부와 함께 살고 있다. 사제들이 톤즈 예수 성심 성당과 8개 공소를 돌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한다.
열악한 환경보다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에 황당
1960년대 시골에서 성장하며 가난을 겪었던 이 신부는 가난한 톤즈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톤즈에는 차원이 다른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신부는 “마치 원시 시대에 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매일같이 충격을 받았다.
“충격의 연속이었어요. 수도원에서 일하는 이들은 바닥을 훔쳤던 걸레로 도마를 닦고, 막힌 변기를 뚫던 ‘뚫어뻥’을 부엌에서도 사용했어요. 돈 보스코 초등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아이들이 수업 중간에 수시로 들락거려요. 저에게 어떠한 양해도 구하지 않고요. 황당했죠.”
이 신부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계속 겪으며, 인간적인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죄책감 없이 물건을 훔쳐가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아이가 수도원에 있는 닭장을 부수고 닭 네 마리를 훔쳐갔을 때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총소리도 수시로 들려왔다.
“처음에는 ‘내가 힘을 보태면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은 버렸어요. 저는 그저 씨앗만 심는 사람이고,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이 신부는 “선교지에서 살아가려면 그곳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하고 탓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면서 “기도 중에 ‘제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하느님께 하소연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 사진 보며 넋두리
“1년 동안 살면서 ‘나는 준비되지 않은 선교사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기 전에는 그저 ‘내가 이곳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지나면서 점점 무기력해졌어요. 어느 순간부터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 또 시작해 보자’ 하고 힘을 내죠.”
이 신부는 힘겨울 때마다 이태석 신부를 생각한다. 수도원 식당에 걸려 있는 이태석 신부의 사진을 바라보며 넋두리를 하기도 했다.
“이태석 신부가 생활하던 10여 년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저는 그래도 이 신부가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살고 있잖아요. 이 신부가 만든 태양열 발전기 덕분에 전기도 쓸 수 있고요. 물도 부족하지 않게 쓸 수 있어요. 이 신부에 비하면 엄청나게 호강하고 있는 거죠. ” 그저 함께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신부는 “짐을 싸서 한국을 돌아가고 싶은 적도 몇 번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을 두고 그냥 떠나셨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제는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그저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수도원 뒤뜰에 텃밭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보내온 씨앗을 심어 방울 토마토, 고추, 오이 등 갖가지 채소를 틈틈이 수확한다.
“낯설고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작물들을 보면서 희망을 품어요. 마치 제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느님께서 이곳에 뿌리신 ‘이해동’이라는 작은 씨앗도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후원문의 : 02-591-6210, 수단어린이장학회
글ㆍ사진=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취재 후기
톤즈에 가기 전 이태석 신부의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와 영화 「울지마 톤즈」를 다시 한 번 읽고, 봤다. 책과 영화에 묘사된 톤즈는 아름다웠고, 톤즈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 신부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직접 본 톤즈는 마냥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었다.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수도, 전기는 끊기기 일쑤였다. 물건을 파는 상점이 없었다. 도로 상태는 최악이어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파도가 심한 바다에서 배를 탄 것처럼 몸을 들썩여야 했다. 온종일 이어지는 무더위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던 15년 전, 이태석 신부는 이곳에서 병든 이를 돌보고 가난한 이와 함께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긴 시간 동안 그토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 세계 곳곳에 파견된 해외 선교사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