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cession in the Streets of Jerusalem, by Tissot 2016년 3월 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 : 이사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제2독서 : 필리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22,14─23,56ㄱ
2016년 3월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새벽을 열며 /조명연 신부님 누군가 인생은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해하지 못할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운전을 해서 밖에 나갔다 올 일이 생겼습니다. 혹시 몰라서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교통체증이 너무나 심한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이 시간에 도로로 나온 다른 차 탓일까요? 아니면 교통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통경찰의 탓일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교통법규를 정확하게 지켜서 운전하는 사람들의 탓일까요?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차가 많이 몰리는 시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려니 생각할 뿐입니다. 세상의 삶도 이런데 하물며 주님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자기를 낮춰서 어떻게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큰 회사의 사장님께서 수출 물량이 너무 넘쳐서 다른 회사에 하청을 줘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급해서 작업복을 입고서 직접 하청을 줄 업체를 방문했지요. 그런데 첫 번째로 방문한 회사에서는 수위실에서부터 퇴짜를 맞은 것입니다. 아무리 자초지종을 말해도 허름한 작업 복장을 보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공장장이 거절합니다. 사장을 만나겠다고 하니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다면서 문전박대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회사를 찾아갑니다. 이 회사는 앞선 두 회사와는 달리 모두가 친절합니다. 수위가 얼른 담당자에게 연결해 주었고, 담당자는 친절하게 사장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사장 역시 겸손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회사에 하청을 주었을까요? 당연히 친절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 마지막 회사겠지요. 오늘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올리브 가지를 흔들면서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며칠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소리를 치면서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뺨을 때리면서 모욕을 드립니다. 어쩌면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180도 바뀔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즉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보였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모든 것이 만족된 상태에서는 주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또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든 시간이 찾아오면 주님을 원망하고 멀리합니다. 주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이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주님의 뜻 역시 이해하기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다고 세상 삶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는 쉽게 포기하면서 멀리할까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 수난의 시간에 반대하는 자의 모습이 아닌, 함께 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새하얀 향기가 나는 꽃길을 그냥 지나치기엔 우리 삶이 너무나 향기롭지 않은가(최상만).
오늘부터 성주간의 시작입니다. 발밑의 행복(틱낫한) 행복이 찾아오는 길은 여러 갈래요 그 표정 또한 천양각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조건과 한계를 붙여 가며 행복을 고르고 있다. 그래서 설령 행복이 곁에 다가오더라도 결코 그 행복을 눈치채지 못한다. 네모라는 행복을 꿈꾸는 당신에게 지금 곁에 다가와 있는 동그란 행복의 미소가 보일 리 없는 것이다. 그대의 삶에 힘을 갖고 싶다면 지금 발밑에 떨어져 있는 그 행복부터 주워 담아라.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틱낫한 스님의 글입니다. 내게 다가온 행복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멀리에 있는 잘 보이지 않는 행복을 가지려고 하기 보다는, 발밑에 떨어져 있는 행복을 주워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개를 숙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겸손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자기 발밑에 떨어진 행복을 쉽게 보고 쉽게 주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에 쓰신 가시관의 가시나무. 엄청나죠? 2016년 3월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재형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성주간은 제게 더욱 깊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지난 2월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셨던 성당,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최후의 만찬을 하셨던 성당, 베드로가 회해했던 닭 울음 성당, 가야파의 집,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골고타 언덕,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 성당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삶이며 실천이란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책을 통해서 읽을 때와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걸어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성지순례, 특히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가보시기 바랍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몇 번 투정을 부리고, 억울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주방 도우미 없이 지내자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빨래며, 청소며, 식사 준비를 하면서 투정을 부렸습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원망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나중에 외국에서 지낼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제게 그런 준비를 시켜 주신 것 같았습니다. 본당 신부님 대신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셨고, 새벽에 일어나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주방 자매님이 저를 깨우곤 했습니다. 늦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저는 부득이 미사 시간에 늦곤 하였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신부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은근히 그런 모습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도 함께 살던 보좌 신부님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반성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것은 배우고, 나쁜 것은 따라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의 길에서 키레네 사람 시몬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준비된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제가 만난 신자 분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비가 엄청 온 날, 늦은 밤이었는데도 비를 흠뻑 맞으며 성당 문단속을 하고, 배수구를 치우며 성모상 앞에서 잠시 기도하고 가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불우한 학생들을 돕고 있으며 무슨 일이 있으면 늘 익명으로 봉헌하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정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던 분도 있었습니다. 동료가 자기 부인을 놀리고 무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바탕 하려는 순간, 본당 신부님 얼굴이 떠올라 꾹 참았다는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며, 사제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교회를 사랑하시는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사제가 피정을 가거나 휴가를 가면 늘 성당에 들러서 수녀님을 챙겨 드리고, 사무실 직원들이 일 잘하도록 격려하며 성당 문도 열고, 성당 앞길도 쓰시던 자매님도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지내면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는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행복했던 그러나 괴로웠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렸던 사람들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 위로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2016년 3월20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오상선 신부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살다보면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사사건건 나를 괴롭히고 나를 반대하고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잘난 체만 하는 이상야릇한 사람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용서해야 할까요? 정말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이라면 용서하기 어렵겠지만 모르고 하는 짓이라면 어쩌겠어요. 용서할 수밖에... 안 그래요. 그러니 무조건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알면서 하는 죄는 용서할수 없지만 모르고 짓는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답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요? 알고서 짓는 죄는 사실 별로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짓는 죄가 많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고해를 하는 겁니다. 오늘 내가 모르는 가운데 지었을 수도 있었을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고 짓는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우리가 알고 짓는 죄라기보다는 모르고 짓는 죄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그랬으니까요. 2016년 3월19일 주님수난 성지주일 루카 23,1-49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루카 23,46) 사랑을 위해 감수하는 고통 /기경호 신부님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모욕과 박해를 받아들이시고(이사 50,5-6),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9). 루카복음의 수난기는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잘 보여주며 그분의 정체성과 우리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에 의한 박해와 고난, 제자들의 배반과 몰이해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까지 용서하시며,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의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을 원하는 적대자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기득권자들의 폭력과 옛 체제의 모순과 거짓을 폭로하시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하느님 스스로 사랑의 괴로움 때문에 당신 아들 예수의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정체성이 다름아닌 '사랑을 위한 고난받는 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을 품고 고통과 절망 중에도 사랑하며, 사랑을 위해 악을 폭로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을 믿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애정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목숨바쳐 정의를 세우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때 괴로워 하며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고 멀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고통 중에도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힘이요, 연약한 우리가 연대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온갖 고통을 견디어내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들의 죽음까지도 허용하시면서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배반할 때에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고통 받을 때, 양심이 뒤틀려 죄를 범할 때, 당신을 조롱할 때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과 더불어 소리 지르시며, 그 사람이 자신의 곤경 속에서 끝내 침묵할 때까지 사랑으로 지켜주시고 함께 십자가를 져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살아있기에 고통 받으며,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기에 인간이 고통 받는다면, 틀림없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 때문에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을 이겨나갈 궁극적인 힘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형제에게 고통을 주고 불의와 차별을 방관하는 것은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동이요, 고통을 견뎌내는 것은 주님의 ‘수난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임을 회상하고 새기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2016년 3월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한상우 신부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우리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수시로 변하는 수많은 나뭇가지처럼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는 거친 숨소리와 뒤틀린 고함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제자신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자신을 위로하듯 당신의 길을 십자가로 걸어가십니다. 지금껏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프게 반성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 없는 우리모두의 아픈 시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다시 만나십니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잎이 돋아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끝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또한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처럼 걷게 될 것입니다. 성주간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거부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우리 마음 속을 걸어 들어오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성주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죽어있는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자신을 살리는 길은 다름아닌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가장 분명한 주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진심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되십시오. 십자가의 주님을 향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닮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내가 뽑힌 이유 /김찬선 신부님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저는 어린 나귀여서 몰랐습니다. 나귀란 등에 뭔가를 태워야 할 존재라는 것을 진정 몰랐습니다. 저는 어린 나귀여서 맘껏 뛰놀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만 좋아했지 짐을 지거나 사람을 태워야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또 저는 어린 나귀여서 힘도 없고 누구를 한 번도 태워본 적이 없어서 누구를 태울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나귀여서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것이 운명이고, 사람을 태워야 하는 것이 운명임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누가 와서 저를 끌고 갔고 저는 생전 처음 사람을 등에 태웠는데 그분은 나를 타고 예루살렘 성읍을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별로 볼 것도 없고, 사람도 많지 않은 시골에서 살던 제게 예루살렘 풍경은 이것저것 못 보던 것들이 많아 매우 낯설었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었는데 왠지 그날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 소리소리 지르며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거였습니다. 소리를 들어보니 제가 태운 분이 보통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환호성을 지른 것이 아니라 제가 태운 분이 대단한 분이어서 소리를 지르고 환영을 했던 거였는데 저는 정말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인지를 몰랐습니다. 진정 제가 주님을 태운 것이었습니다. 아무 짐도 지고 싶지 않았던 제가, 아무도 태워본 적 없던 제가 처음 누굴 태웠는데 그분이 주님이었던 겁니다. 두 가지 감정이 같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태웠다는 우쭐하는 마음도 있었고, 자랑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른 훌륭한 말들도 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태웠던 노련한 나귀들도 있는데 그들을 놔두고 저를 선택하신 것이 너무 과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왜 저를 뽑으셨는지 여쭈었습니다. ‘주님, 훌륭한 말과 어른 나귀들도 많았는데 그런 것들은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왜 어리고 약한 저를 뽑으셨습니까?’ 그러자 ‘나는 지금 죽으러 가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멋진 말이 필요치 않고 너 같이 힘없는 나귀가 제격이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멋진 말은 세상 임금이나 귀한 사람들이 타는 것이고, 곧 죽으실 주님께는 제가 필요하다는 말씀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비참하게 죽으실 거라는 것이 너무 충격이었고, 제가 그런 현장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도 경험도 없어서 짐을 지거나 누굴 태운다는 것이 너무 버거운 저이지만 저는 버거운 짐을 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태우는 것도 아닌 주님을 등에 업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난의 현장엔 정말 비실한 제가 제격입니다. 저는 힘이 없고 경험도 없기에 권력을 등에 업을 수는 없고, 비틀거리면서 주님을 업고 다닙니다. 저는 비틀거리지만 그래도 저는 주님을 업은 사람인 겁니다. 이것이 저의 자랑이고, 이것이 저의 사명입니다.예루살렘 입성, 10세기 상아 부조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자, 따라 걸읍시다.> /조영만 신부님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 자신을 동참시키는 행위이자 그 반복의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믿고 우리가 본을 삼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장면을 우리 삶 한 가운데에 재현시키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뒤따르기 전, 이 예루살렘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성 안드레아 주교의 말씀으로 이 행렬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자, 그리스도를 만나러 올리브산으로 올라갑시다. 오늘 베다니아에서 돌아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의 신비를 성취 하시고자 자원하시어 거룩하고 복된 수난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분은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처럼 화려하거나 의기양양하게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은 자 없었습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천한 옷을 입고 가난하게 입성하십니다. 자, 와서 당신수난으로 바싹 다가서시는 그분께 달려가 그때 그분을 맞이한 사람들을 본받읍시다. 그러나 길에다 올리브 가지나 옷자락이나 팔마 가지를 깔지 말고, 우리 자신은 최대한의 겸손된 마음과 올바른 정신으로 그분 앞에 엎디어 다가오시는 말씀을 받아들입시다. 그 무엇으로도 담을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맞아들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동안 우리 눈을 즐겁게 하지만 곧 시들어 버릴 생명 없는 나뭇가지나 옷자락을 깔지 말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깔도록 합시다. 그분의 은총을 옷 입고, 또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 자신을 옷 입어 옷처럼 그분 앞에 깔도록 합시다. 이전에 죄로 인해 진홍색같이 붉었지만 구원의 세례가 베푼 정화로써 양털처럼 희어진 우리는 이제 종려나무 가지가 아닌 승리의 상을 죽음의 정복자에게 바칩시다. 매일매일 우리도 아이들처럼 영혼의 영적인 가지를 흔들면서 그들과 함께 거룩한 찬미가를 부릅시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성 안드레아 주교의 강론에서) 이제, 우리 공동체도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따라 행렬을 시작하겠습니다. (수난 복음 후 강론) <숨은 그림 찾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일 년을 통틀어 '미사 가운데'에 예수의 수난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교회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세 개의 수난기를 가,나,다해에 맞춰 편성하고, 미사가 아닌 '수난 예식'만 거행하는 성 금요일에는 요한복음서의 수난기를 전체 교회가 묵상하게 합니다. 올해는 전례 상 '나해'이기에 마르코에 의한 수난기를 역할을 나누어 읽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이 수난기가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수난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비열한 세상사가 적나라하게 기록된 단편이며, 무수한 인생이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아주 짧은 묵상집입니다. 수난기를 수난기로만 읽는다면 우리들은 이 내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난기 속에서 나를 읽어보시고, 여러분의 얼굴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신다면 이 수난기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많은 얼굴들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줄 것입니다. 오늘 매일 미사의 지침에서는 '수난기 봉독 끝에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복음서에 대한 경의 표시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론을 짧게 한다!' 고 밝히고 있습니다. 짧게 강론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단체 여행을 가든 성지순례를 가든 찍었던 사진을 꺼내면 가장 먼저 자기의 얼굴을 찾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수난기 속에서 여러분의 얼굴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군중의 하나입니까? 그렇다면 어떤 군중입니까? 변방에서 시작된 하느님 구원의 메시지가 탐욕과 착취가 난무하던 땅 서울 예루살렘, 권력과 야합을 걷어낼 위대한 외침으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기 위해 입성하시는 그 예수를 환호하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죽여 버리라고, 무엇이 할퀴고 간 것인지 아무도 묻지 않는, 망각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가야파의 대저택 앞에서, 나는 죄가 없다고 손을 씻던 빌라도의 광장 앞에서, 차라리 살인자 바라빠를 놓아주고, 나자렛 사람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아 달라고 외치던 그 군중 속에 나의 얼굴이 있습니까? 환호하던 그 입술에서 어떻게 참혹한 죽음의 저주가 쏟아질 수 있는지 궁금하였으나, 막상 짧은 인생을 살아보니 세상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더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중 속의 익명은 비겁한 법이고,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권력자들은 언론과 여론을 교묘하게 자기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되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도 이것이 여론몰이를 통해 교묘한 포장을 시켜놓으면 군중들의 양심은 막혀버립니다. 20%만 포섭하면 80%는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군중입니다. 어떻게 히틀러라는 인물이 다수당 당수가 되었습니까? 그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합법적인 투표를 통해 집권하였습니다. 그 배후에는 독점적인 재벌 언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군중들의 가슴 속에 있던 증오와 보복과 저주를 이끌어냈고 그것을 한 곳에 집중시켰습니다. 600만 유태인의 학살은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비상식적인 대중심리를 자극해서 말이지요. 지금 한국도 그렇습니다. 언론을 장악을 서슴없어합니다. 조중동 신문만 보고 앉아 있으면 한국은 빨갱이의 나랍니다. 50년 전에도 그랬는데 불행히 아직 '그들의 나라'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는 늘 가야파의 논리가 적용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 말입니다. 그들은 질서와 정의와 평등을 말하면서도 결국 이를 내세워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할 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좀 배웠다, 좀 한다, 한 자리 하고 있다는 위인들은 불행히도 대부분 가야파의 이 악마적 논리를 마치 시대적 명분인냥 지껄이고 있습니다. 경제발전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은 아무 것도 아니고, 국익을 위해서는 남의 나라 전쟁에 청년들 몰아넣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없는 사람, 못난 사람, 백주대낮 여섯 명이나 불에 타 죽는 것 정도는 빨갱이들의 불법데모로, 그들은 단 한 번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편에 서지 않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얼굴들이 고스란히 있습니다. 예수의 재판 속에 등장하는 배심원들, 검사들, 군인들, 재판관들, 이미 예수는 체포되면서부터 그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이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지금은 없을까요? 대단히 슬프게도 이런 얼굴들은 너무 많이 우리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심지어 대법관이라는 인간들마저도 입만 열면 정의구현을 외치면서도 돈은 다 받아먹습니다. 재벌은 벌하지 못하고 서민 신용불량자에게는 가차 없습니다. 언론은 건드리지 못하면서 인터넷의 논객들은 추적을 해서라도 잡아들입니다. 더 교묘한 얼굴은 배웠다는 지식인들, 당대의 교수들 곧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기득권의 통치 유지를 위해 비겁하게도 지식을 이용하고 학문적인 권위를 앞세워 '어용짓'을 합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라고 애초 고발했던 예수가 식민 통치자 빌라도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인 인물로 부각되지 않자, 그들이 나서서 예수의 죄목을 황제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치범, 황제에게 대항하는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사형 언도가 가능케 합니다. 권력자의 탐욕적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어용 지식인들, 땅을 파헤치고 산은 허물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위배하는 '삽질 정권'이 작당하는 일을 두고 또 무슨 수천억의 황금알을 낳는, 국운이 걸린 중차대한 사업이라고 찬양하는 교수들 박사들 3류도 못 되는 저급한 배우 같은 얼굴들이 권력자의 주구走狗, 노릇을 자처합니다. 여론은 호도되었고, 거짓의 증인들은 채택되었으며, 부당한 재판은 신속하게 처리됩니다. 이제 예수가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습니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데 입은 세 개만 모이면 되듯, 이 모든 것이 결합되면 하느님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들이 만나야 할 얼굴들이 또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얼굴과 유다라는 얼굴, 그리고 십자가 길과 골고타 언덕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군상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나마 용감한 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는 데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실토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성호도 제대로 못 긋습니다. 내가 바로 그의 사람이요, 내가 바로 그런 죄인이라고, 제때에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던 그는, 드러내고 표현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만든 그 사랑이 바로 나의 죄임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유다 역시 베드로와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유다가 되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유다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하지만 보십시오. 우리 또한 은전 서른 닢보다 더 못한 값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를 팔아넘기고 있지 않습니까? 훨씬 싼 값에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성당에 왜 못 나오십니까? 이유는 별 것 없습니다. 볕이 좋으면 바람 쐬러 가야하고 적당히 바람 불면 골프도 치러 가야하고, 오만 계에 취미 모임에 한인 모임에 심지어 TV드라마는 다 챙겨 볼 시간이 있어도, 그 중에 은전 서른 닢보다 더한 것 하나도 없는데도, 훨씬 싼 값에 예수는 번번이 무시당하고 팔려갑니다. 그러면서 유다를 욕합니다. 욕 할 것 못 됩니다. "우리 형제 유다"입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헐값에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절망하고 중단한 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은 죄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얼굴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자비를 믿었고 하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믿는 자는 돌아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갈바리아에서도 똑같은 얼굴로 재현됩니다. 예수의 곁에 매달린 두 강도의 얼굴들 말이지요. 강도 두 명이 똑같이 범죄를 저질렀고 악행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고 절망하며 죽어갑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지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주님의 수난기를 묵상하고 이번 한 주간을 일 년 중 가장 특별한 회개와 자비의 기간이라고 믿으신다면 "선생님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해" 달라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은혜로운 자비의 때'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성삼일 전례가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먼 곳에서 미사 오는 것 힘들다는 사실 압니다. 연세가 들어 운전조차 어렵다는 것 압니다. 저만 알겠습니까? 하느님이 모르실리 있으시겠습니까? 하지만 바쁘고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십자가를 향해 몸을 일으키시는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 직전에서도 저를 기억해 달라는 강도의 청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그분이 어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각자 인생의 십자가 안에서 다시금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재현하고자 성삼일 전례 속에 모이는 이들의 청을 어이 마다하실 수 있겠습니까? 파스카를 지낸다는 것은 매년 벌어지는 반복적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점층적으로 세월과 함께 체화되는 시기입니다. 그의 수난이 나의 수난으로,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그렇게 그리스도의 성삼일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개인적으로 체험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했다니까 그런가보다. 그런 부활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활은 개인, 개인이 다가서야 하는 각자의 신앙체험에 가깝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만나고 똑같이 죄를 짓고 똑같이 그를 배반했지만, 베드로는 부활했고 유다는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두 명이 달렸지만 하나는 부활했고 하나는 죽었습니다. 누군가는 비관과 절망에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 있었지만 누구는 향료와 기름을 준비하여 신 새벽의 무덤가로 뛰어갔습니다. 누가 예수를 만났습니까? 누가 구원을 만났고, 누가 자비와 은총의 새로운 생명을 살았습니까? 부활을 교회의 행사로 만들지 마시고 내 신앙의 성사로 바꾸시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얼굴을 공개하겠습니다. 부활이 결국 하느님 앞에서 만나야 하는 개인적 죽음과 거듭남의 길임을 가장 잘 드러내어주신 마지막 얼굴, 이 지극한 배신의 세상과 야합의 왜곡 앞에 절망과 좌절이 난무하는 인간사의 파노라마 속에 마지막 한 퍼즐 조각이 되시어, 이 전체를 새로운 희망 그림으로 바꾸셨던 수난기 복음, 숨은 그림 찾기의 마지막 주인공, 마리아의 얼굴입니다. 침통한 눈물과 지극한 상처와 그리고 아들의 죽음이라는 쓰라린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항 없이, 분노 없이, 후회 없이 끝까지 그 길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셨던 그 얼굴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어머니된 마음으로 이 성삼일을 지냅시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 다시금 부활하고 다시금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차 올랐던 기쁨을 의탁하며 이 한 주간, 새싹을 감추어둔 대지처럼 살아갑시다. 유다처럼 나무에 목을 매지 마시고, 마리아처럼 끝까지 그리스도의 목에 부디 매달리십시오. 나무에 매달리면 죽을 뿐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에게 매달리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성주간을 통해 여러분 각자의 얼굴을 잘 발견하시고 잘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양승국 신부님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 번잡하지 않은 낮 시간대에는 각종 생필품을 직접 들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되지요. 지병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한 중년신사가 생필품 세트를 팔기 위해 제 바로 앞에서 멈췄습니다. 제품의 우수성과 저렴한 가격에 대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였는데, 자신감 없어 보이는 얼굴표정을 통해 그날 처음 나온 분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지, 제품을 들고 한 바퀴 돌았지만 아무도 물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급하게 내리던 한 승객에 의해 제품이 가득 담긴 여행용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물건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가방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분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으셨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한쪽 팔에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보기가 딱했기에 제가 다가갔습니다. 함께 물건을 주워 담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래도 힘내세요!"하고 물건 하나를 샀습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다음 칸으로 향해 가는 그분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제 마음이 몹시 슬퍼졌습니다. 때론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우리가 아직 먹고 살 만하면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면서 말기암환자를 위해 드리는 기도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슬픔은 더 큰 슬픔을 통해서, 좌절은 더 큰 좌절을 통해서만이 극복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연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비와 의미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갖은 고통의 치유를 위해 더 큰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늘 수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을 덜어주려고 더 큰 슬픔을 선택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와 고통, 십자가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예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밑바닥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직접 짊어지셨고, 고난과 저주의 쓴잔을 기꺼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임종자로서 단말마의 고통, 이국땅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서러움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와 나란히 누워, 그의 동료로서 위로와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무게가 너무 무거워 죽을 지경인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만 참아. 힘내!"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우리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선택하셔서 직접 지고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오늘 고통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인 죽음의 고통을 잘 참아냄을 통해 영광스럽게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한 예수님의 최후를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통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극복해야 할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성서는 우리가 그토록 부담스러워하고 힘겨워하는 고통 앞에 딱 부러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비법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겪으셨던 그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없애지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 옆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우리와 나란히 서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눈에서 눈물을 없애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오신 것이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신 것입니다"(클로텔). 죽으러 가자! /강영구신부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과 레위인들 중에 예수님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다. 몇몇 아이들과 내쫓긴 변두리 인생들이 예수님을 환영한다. 붉은 양탄자 대신에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화려한 승리의 깃발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다. 저 멀리 골고타 언덕 위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고, 그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 입성하신다. 정복하고 승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입성하신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예수님의 제자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평화의 왕 예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자비와 용서를 베풀기 위해서, 함께 삶을 나누기 위해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죽기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는가. 군림하고 통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삶을 내어주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는가. 복음福音으로 세상을 정복征服한다는 교회의 꿈이 얼마나 허황된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복음은 정복을 위한 지침서가 아니다. 복음은 승리를 위한 매뉴얼이 아니다. 복음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내어주고 함께 삶과 생명을 나누기 위한 선언문이다. 복음은 죽음의 길잡이다. 하늘나라天國는 그렇게 해서 도래하는 것을. 승리주의에 사로잡히면 복음을 버리고 칼을 잡게 된다. 그리고 편 갈라서 상대를 이기려고 덤비게 된다. 그 순간부터 승리가 아니라 폐망의 길이 열린다. 예수님도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십자군 전쟁을 생각해보라.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시노드에서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선언하고 복음이 아니라 칼을 잡는다. 200년 가까이 진행된 십자군 전쟁은 끝내 실패하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천 년의 세월이 지난후, 2000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용서의 날’ 미사에서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 범죄에 대한 정화의식’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의 잘못을 용서 청하게 된다. 스승 예수님처럼 나귀를 타고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자! 정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섬기러 가자! ♪ 성주간(Holy Week)...그레고리안 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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