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sciples Admire the Buildings of the Temple "너희가 보고있는 저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by Tissot 2016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 제1독서 : 말라 3,19-20ㄴ 19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제2독서 : 2테살 3,7-12 형제 여러분,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1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12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복음 : 루카 21,5-19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2016.11.13 연중 제 33 주일 평신도도 성소다.../김찬선 신부님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미사를 오랜만에 봉헌합니다. 그래서 평신도에 대한 강론을 준비하려고하니 지금까지 성직자 수도자 성소에 대해서만 많이 생각을 했지 평신도 성소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생각해왔음을 깨닫고 덕분에 평신도 성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고 평신도와 관련한 공의회 문헌을 다시 뒤져보게 되었답니다. 참 형편없는 사제이고 수도자이지요?! 제가 읽은 문헌 중에서 한 부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속 안에서, 곧 각각의 세상 직무와 일 가운데서...가정 생활과 사회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서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이 말씀 안에서 저는 두 가지를 포착했습니다. <세속 안에서>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평신도의 삶도 성소인데 <재속 성소>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평신도란 사제가 되지 못했거나 되지 않은 사람, 다시 말해서 그저 사제가 아닌 사람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사제가 아닌 사람이 평신도이고 평신도가 아닌 사람이 사제인 것은 맞지만 사제가 하느님의 성소이듯이 평신도도 하느님의 성소라는 것입니다. 별 고민 없이 평신도가 된 분에게는 이 말이 뭔 말인지 의아해하시겠지만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중에서 어떤 삶을 살까 고민한 사람, 둘 중에서 하느님은 나를 어디로 부르셨을까 고민한 사람은 평신도가 하느님의 성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수도생활과 사제생활을 하다가 평신도 성소를 찾아간 분도 많고, 사제나 수도생활을 지망하다가 세상 가운데서 사는 것에 나의 성소가 있음을 발견하고 평신도의 삶을 선택한 분들도 꽤 있는데 이 분들은 평신도를 성소로 적극적으로 선택한 분들입니다. 아무튼 평신도는 하느님께서 부르지 않은 사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문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자기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며 복음 정신을 실천하고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의 성화에 이바지하며” 그렇습니다. 재속성소란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을 성화하고 복음화 하는 것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연꽃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연꽃은 흙탕물 가운데 피어 그 아름다음과 향기를 전하지만 결코 그 물에 잠기지 않는 존재지요. 평신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지만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삶으로써 그들을 복음화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살기에 그들에 의해 세속화되지 않으려면 철저히 자기 복음화가 되어 있어야지만 하는 분들입니다. 문헌은 이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또 그렇게 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증거로써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빛을 밝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평신도는 삶의 증거로써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들과 삶이 다른데 그것이 복음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본당에서 성탄판공을 하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타니 택시 안의 분위기가 남달랐습니다. 택시 안의 꾸밈이나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운전기사 자신이 남달라 아주 점잖고 정중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인 저에게 의견을 묻고는 신앙얘기를 하면서 저보고 신앙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고 천주교를 소개하는 거였습니다. 수도복이나 사제복을 제가 안 입었기에 그런 것인데 망설이다가 제가 누군지를 알려주고 오는 내내 신앙얘기를 하였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운전하며 신앙을 얘기하며 권면 받은 적은 있지만 천주교 신자가 이런 적은 없었기에 물었더니 기사 사도회에 속하면서 매주 성경공부도 하고 장애인봉사도 하는 분이었습니다. 하도 감동을 받아서 제가 12시가 넘었음에도 수도원으로 모시고 와 커피대접을 하고 안수축복도 해주고 보내드렸는데 그분은 그것으로 자기의 생계도 해결하면서 복음도 전하는 그야말로 <기사 사도> 곧 기사로서 복음 선포자였습니다. 이것이 평신도를 성소로 살고 자기의 직업을 소명으로 생각하며 사는 본보기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러해야겠지만 여러분도 여러분의 성소와 소명을 다시 생각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2016년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새벽을 열며 /조명연 신부님 예전 보좌신부 때 만났던 한 청년이 생각납니다. 벌써 15년도 훨씬 넘었으니, 지금쯤은 청년이 아니라 중년의 나이로 어디선가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요.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을 하면서였습니다. 저의 강요로 청년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너무 조용하고 내성적인 것입니다. 늘 뒤에 서서보고만 있는 방관자의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았습니다. 같이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지요. 몇 달 뒤, 청년 모임에 참석했는데 처음에 보였던 소극적인 모습 과는 달리 너무나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잘 펼치고 있었고, 분위기 썰렁해지는 유머까지 하면서 많은 말을 하더군요. 또한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늘 앞에서 솔선수범하며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청년회장에게 저 친구가 왜 저렇게 바뀌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말도 많이 하고 행동도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지요. 호감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좋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성이 어떻게 바뀔까 싶지만, 사랑한다면 바뀔 수도 있음을 이 친구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과연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할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꿀 수밖에 없겠지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삶을 살라는 주님의 뜻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혹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와 함께 세상의 멸망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왜 이런 끔찍한 말씀을 해주실까요?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 이었습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올 날이기에 이 날을 위해 우리가 잘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준비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피하고 싶은 그 마지막 날을 위한 준비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랑의 삶뿐입니다. 비록 이런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기쁘게 사랑의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말씀처럼 인내로써 생명을 얻게 됩니다. 무엇이 진정 행복인지 늘 확인하지 않으면 정작 그것이 찾아와도 받아들일 줄 모른다(김경진). 인내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의리 연예인 중에서 ‘의리’를 외치는 분이 계십니다. 광고에도 종종 나와서 ‘의리’를 외치기에, ‘유치하게 의리가 뭐야.’ 하고 생각하곤 했었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기사를 통해 이 연예인이 소아암 아이들을 위해 삭발을 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아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격투기 대회에도 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말을 외치더군요. “의리.” 이 분의 아내 역시 3년 동안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합니다. 남편의 뜻을 함께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네요. “의리.” 오래 가는 사랑에는 의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람과의 의리, 세상과의 의리를 통해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과의 의리는 어떻게 잘 지켜지고 있는지요? 혹시 주님께만 의리를 지키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의리를 지키자고요. 2016년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 /오상선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세상이 어수선하고 시국이 어떻게 변해갈 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듭니다. 너도나도 살기 힘들다고 소리치고 이건 아니라고 목소리를 외칩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남은 어떻게 되든 나 몰라라 하는 문화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의 위험이 더욱 우리 삶 가까이에서 상존하고 있고 대형 사고와 재앙이 더욱 자주 일어나 불안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두고 항상 종말론적 사고가 일어납니다.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닌가?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우리나라가 망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혼란기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사실 세상은 늘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세상은 우리가 함께 건너야 할 광야이고 우리가 함께 항해해야 할 바다입니다. 광야와 바다는 늘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서운 이리떼를 만나기도 하고 거센 풍파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불확실성과 위기를 함께 잘 넘길 수 있게 해 줄 훌륭한 선장과 인내심 많고 충직한 선원들이 필요합니다. 난파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을 맞고 있는 대한민국호도 그렇습니다. 믿음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교회도 그렇고 위기의 가정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는 걱정이 없습니다. 최고의 선장으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천상 예루살렘, 하느님 나라로 안전하게 이끌어 주실 예수님이 계시고 훌륭한 동료 선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걱정 붙들어 매고 묵묵히 일상을 인내하며 살기만 하면 됩니다. 호들갑 떨수록 배가 산으로 갈지 모릅니다. 묵묵히 인내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6년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탐욕과 불의의 성전을 허물고 /기경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성전파괴와 종말에 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과 즈루빠벨은 515년 새로운 성전을 세웠지요. 헤로데 대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이 두 번째 성전을 기원전 19년에 시작하여 64년에 걸쳐 증개축했습니다. 당시 헤로데는 이방인들을 동원하여 통치하였고 이교신전을 세워 그리스 사상을 퍼뜨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원형경기장과 대형 극장을 세워 이교적인 경기를 개최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다양한 문명과 종교가 뒤섞여버려 일치되어 율법정신을 살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지요. 한마디로 헤로데가 증개축한 성전은 모순덩어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보며 감탄 하며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말합니다(21,5). 그러자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고 이르십니다. 예수님의 성전파괴 예고는 사실 충격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온갖 문물이 뒤섞여 흥왕성세를 누리는 듯 보이는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성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는 헤로데와 같은 권세나 인간이 이루는 대단한 업적들, 화려함과 웅장함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헛되고 헛된 것임을 선언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인간의 계획이나 이해타산적인 계산과는 전혀 달리 펼쳐집니다.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오고,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고 말 것이나,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미카 3,19-20)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불의와 불평등, 이기심과 탐욕, 차별과 부조리가 맹위를 떨치는 듯합니다. 몰염치한 정치가들, 비굴한 언론인들, 악을 일삼는 자들,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더 잘 되고 편안하게 사는 세상인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은 부조리한 회의를 느끼고 체념하고 좌절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우리 삶의 실존 상황이 바로 예수님께서 파괴될 것이라 예고하신 성전이며, 세우기 위해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탐욕과 불의와 거짓을 따르는 인간사회는 결국 혼란 속에 파국으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반대와 박해에 부딪친다 해도 굳은 믿음과 인내로써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 땅의 현실이 부조리하고 불의하며, 비상식이 일상화되어 간다 해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친히 권력 유지를 위해 공포를 조장하고 국민의 주권을 무시하는 정권, 여론을 왜곡하는 언론, 자본가들의 탐욕, 이념적 갈등을 부추기는 악과 불의에 맞서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매순간이 종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뜻을 실행해나갈 때 그 어떤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여도 그것을 관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고, 그래서 인간을 죽이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아닌 행복한 인간으로 가득 찬 진정 거룩한 성전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2016년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이정주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종말에 대한 말씀은 묵시 문학적 표현으로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종말은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구원과 희망의 대상입니다. 천지창조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사랑의 계약을 맺으셨고, 또한 그 계약에 끝까지 충실하십니다. 반면 인간은 그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고,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구원자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분께서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마지막 때를 여시고, 이어서 모든 생명이 충만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거저 오거나, 우리와 관계없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마치 외부에서 주어지는 마술 행위나 기계적 행위처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시대의 징표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징표를 알아듣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이 구원 사업에 직접 참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중심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있고, 그 안에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의 편을 가르는 모든 벽이 다 허물어져, 완벽한 그분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적들에게 승리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죽음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으로 받아들인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가장 위대한 사랑이 실현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통, 에곤쉴레 일상 안의 박해 /서현승 신부님 예전에 종신서원을 준비하면서 수도자의 서원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수사님이 들려주셨던 말씀이 지금도 제 마음 안에 남아 있습니다. ‘서원이란 한 번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에 다시 서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겠다고 한 우리 신앙인들이지만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의 욕구나 가치들을 포기하고 복음적 삶을 산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말씀에서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얻게 됩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믿음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든, 인간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든, 세상을 거슬러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모든 신앙인들에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의지 이전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신앙인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기신 싸움에 동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힘 /이재화 신부님 교우들과 신앙상담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도 인생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특히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분들일수록 신앙의 위기를 더 크게 느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인생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때론 열심히 살지 않는 이들이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같아 우리를 더욱 속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제가 늘 하는 권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보호자를 얻게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갑자기 원하는 대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뀌어야 할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뀌고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각이 바뀌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의 인생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인생의 어려움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신앙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신앙이 이런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신뢰와 예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실 만큼 우리 각자가 그분께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이는 단순히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산다는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양승국신부님 가끔씩 크게 싸운다거나 가출을 하는 등 대형사고를 치는 아이들을 데려다놓고 제가 잘 써먹는 레퍼토리 한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그래 너도 한번 맛 좀 봐라!"하면서 먼저 한 대 쥐어박고 시작하고픈 유혹이 생길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저는 이런 말을 던집니다. "**야, 네 마음 내가 잘 안다.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 하도 답답해서 그랬다는 것을 잘 알지.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보거라. 내가 가끔씩 교도소 재소자들 만나러 가는데,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면 하나같이 다 착한 사람들이란 걸 너 아냐? 그런데 그 사람들 단 한가지 결점 때문에 거기서 그 지독한 고생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욱’하는 성격, 쉽게 끓고 쉽게 열 받는 성격 바로 그 성깔 못 이겨서 그 죽을 고생들을 하고 있는 것이란다. 세상은 머리로 싸워야지 힘이나 주먹으로 싸우면 끝이 뻔하지. 끝은 철창이고 죽음이야." "자 그럼 약속하나 할까?" "무슨 약속이요?" 스팀 왕창 받아서 주먹이 먼저 나가려고 부들부들 떨릴 때조차도 속으로 천천히 셋을 세어보는 약속. 오늘 복음 말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지당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어찌 그리도 우리의 약점들을 잘 알고 계시고 필요한 점들만 꼭꼭 지적해주시는지 감탄할 지경입니다. 사실 참고 견디는 것만 잘해도 인생의80%는 이미 성공한 셈입니다.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번 참지 못해서 다된 밥에 재 뿌리는 어리석음을 범한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100번 잘 하다가도 한번 그’욱’하는 성깔 참지 못해 오랜 기간 공들여 쌓아온 좋은 이미지를 한번에 사정없이 구겨버리는 체험들을 우리가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한번 참으면 진리가 보이고 두 번 참으면 성덕이 쌓이고 세 번 참으면 세상이 온통 천국입니다. 산다는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참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 다 못하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못하고 사는 것 그것이 또 인간세상이지요. 참고 또 참고 견뎌나가다 보면 세월이 가고 그렇게 삶의 지혜와 경륜을 쌓아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든든한 반석磐石 /강영구신부님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가21,14-18) 스승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마태7,24-25) 평소에는 모른다. 위기의 시간이 닥쳐봐야 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큰물이 닥치면 비로소 그 집의 기초가 어떤 것인지 안다.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큰물이 밀려와도 평화롭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위기의 시간이 닥치면 불안에 떤다. 그리고 후회하지만 때는 늦다. 이미 큰물이 집을 쓸고 간 후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누가 어디에 인생의 기초를 놓고 사는지 모른다. 시련과 유혹, 고난과 박해의 때가 닥치면 비로소 누가 어디에 인생의 기초를 놓았는지 알 수 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그분 안에 귀의처歸依處를 마련한 사람은 박해와 시련의 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화롭다. 만세반석萬歲盤石 하느님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도록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돈과 재물, 지위와 권세, 혈연과 지연 따위는 현실 생활을 안락하게 해주는데 유용할 수는 있어도 인생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 위기와 시련의 때가 닥치면 그것들은 철저히 나를 외면하고 만다. ♪ Veni Creator(오소서 성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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