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그분
복음: 요한 5,17-30
시인 도종환은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인은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이라 했다.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이라 했다.
그런데 “그 시인은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묻는다. <내 안의 시인>이란 시의 내용이다.
사순절 막바지다.
공동체가 사라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시대에 되찾아 와야 할 ‘우리들의 시인’은 누구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 264항에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고 생기 없고 피상적인 우리 삶을 흔들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한다.”면서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을 알아보라고 청한다.
예수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고 나타나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타나엘은 그 뜨거운 눈길이 ‘사랑의 눈길’임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시인의 눈길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 안에 있는 시인이 예수님이라면, 아마도 예수님 안에 있는 시인은 하느님이셨던 모양이다.
그 하느님을 잃지 않고 사셨던 모양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 다정한 당신, 그 다감함을 잊지 않고 사셨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분은 혼자여도 행복하고, 여럿이어도 다복했을 것이다.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경계를 넘으면 다음 경계를 넘는 것은 수월한 모양이다.
하덕규란 가객은 <가시나무>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라고 노래했다.
시인이 사라진 숲은 이미 숲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일 텐데,
내 안에 그 시인을 다시 불러들일 방도는 없는 것일까?
아니, 그 시인은 그대로 제 자리에 있는데, 내가 그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 안에 있는 그분께 손 내밀고 싶다.
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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